회개없는 믿음으로 구원은 없다.
신앙계 2018.03. 성현경목사
오늘날 구원을 위한 전도멘트는 “예수 믿으세요” 이다. 게다가 덧붙여서 “예수믿으면 좋습니다. 행복합니다”라고 전한다. 이것은 복음의 결과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줄 오해하게 됬다. 바울이 빌립보 간수에게 한 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라는 멘트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그 말씀 앞에는 감옥문이 열린 것을 알게 된 간수가 자결을 하려고 할 때 바울이 그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간수는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행16:29)’는 사실을 간과한다. 간수는 자결을 하려고 할 만큼 죽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회개이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전도 멘트로 더 익숙한 귀절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3:16) 이 시대에 아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같다. 미국에선 아예 ‘John 3:16’ 이렇게만 쓰여진 팻말이 집 앞에 꽂혀있고 자동차 뒷범퍼에 스티커로 붙여있기도 하다.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마치 누구나 쉽게 믿기로 결단하기를 바라는 열망이 그 팻말과 스티커를 붙인 사람의 신학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요한이 그렇게 해설한 그 앞의 말씀은 세상 사람들에게 동시에 소개되지 않는다. 요3:16은 예수께서 밤중에 찾아온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을 요한이 받아 리메이킹한 것이다. 먼저 니고데모는 예수를 랍비라고 존칭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긍정적으로 인정한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그 대화는 결국 부정적으로 끝난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3:12)고 예수는 믿지 못함을 지적했고 이어서 하신 예수의 설교에 니고데모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그 마지막 멘트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였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믿는다던 니고데모는 더 이상 예수의 설교에 반응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의 반응이 더 이상 기록되지 않았다. 그 후로부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다시는 예수를 만나지 않았다. 예수께서 죽은 후에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청하여 자신의 무덤에 안장할 때 니고데모가 다시 나타난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19:39) 살아계신 예수께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지만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섬기러 온 셈이다.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19:40) 그러나 그것도 소용없었을 거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함께 예수의 시체에 그 향품과 함께 장례했지만, 예수의 몸은 죽기 전에 이미 귀한 향유로 장례준비가 되었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마26:7)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26:12)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헌신되고 겸손한 주님의 죽음을 아는 여자가 귀한 향유로 예수의 장례를 준비하였고 아무튼 니고데모가 예수를 다시 찾아왔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였다.
니고데모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자신 스스로 인정한 분의 말씀을 왜 받지 못한 걸까? 이것이 중요하다. 그는 예수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고 믿는 선생과 대화를 하다보니까 예수의 설교 때문에 오히려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빠르고 쉽게 즉각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요3:16을 소개하고 있지만, 사도 요한은 요3:16을 니고데모가 왜 받지 못했는지를 먼저 기록한 것이다. 또 세례받은지 40년이 되어가는 이제서야 이 스토리 전체를 이해하며 이렇게 길게 설명하려는 나의 아픈 이유이기도 하다.
먼저 30대 초반의 젊은 예수께 랍비라고 호칭하면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니고데모는 이미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호의적으로 찾아왔는데, 예수께서 ‘위로부터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5)는 이해할 수 없는 부정적인 말씀으로 먼저 대하셨다. 그 다음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런 것들,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안좋게 말씀하셨다.(요3:10) 니고데모는 예수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존중했는데 예수는 “넌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이런 것을 모르느냐”고 당황스럽게 답하신 후에 이어서 ‘땅의 것을 말하여도 믿지 아니하는데 하늘의 것을 말하면 네가 어떻게 믿겠느냐’(요3:12)고 하시니 이건 설명이 아니라 공격이고 예의 없는 책망이다. 더 심각한 것은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믿고 찾아왔는데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믿지 않는다’고 판단하신다. 결국 예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니고데모는 예수를 거절하게 된다.
니고데모에게 하신 그 마지막 멘트는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그 날밤에 들은 유일한 긍정적인 말씀이었는데, 여기서 예수께서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한 ‘그’가 문제였다. 그는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장대에 매달린’ 인자(人子)이다. 니고데모의 막힘은 ‘왜 자신이 장대에 매달린 인자를 믿어야만 하는가’이다. 자신은 하나님을 이미 믿어왔고 예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증거라고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그 밤에 예수께 찾아와서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3:2)라고 믿음을 고백했는데 말이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가 이미 알고 있는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매달게 된 민수기 사건을 말씀하셨다. 애굽에서 광야로 나온 사람들은 길이 험하다고 하나님을 원망했고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불뱀을 보내셨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21:6)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낸 불뱀에 물려죽는 사람들을 보며 범죄했음을 고백하게 되었고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21:8)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것을 패러디하신 셈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즉, ‘니고데모, 너는 뱀에게 물려있어. 그러기 때문에 장대에 매달린 인자를 바라보고 그를 믿어야만 해’ 유대인의 지도자이며 선생인 니고데모는 이것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말은 자신이 뱀에게 물려서 바울이 표현한 대로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엡2:1)이며, 칼빈이 말한 대로 ‘전적 타락’(Total Depravity)한 상태라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을 따르는 유대인의 선생으로 예수에 대한 믿음까지 있는 니고데모는 회개하라는 멧세지를 결코 받지 못한 것이다.
회개없는 믿음은 불가능하다.
회개없는 믿음은 결국 예수를 버릴 수 밖에 없다.
니고데모처럼.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베드로처럼.
요3:16은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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